부산작가회의 시국선언문- '국익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작성일 23-12-07본문
국익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봄꽃이 봄꽃 같지 않다. 마냥 환할 수 없는 봄, 올해처럼 우울한 삼월이 없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탄식이 앞선다. 삼일절 기념사에서부터 출발하여 역사의식이 증발한 이 정부의 굴욕 외교는 일본의 역사 왜곡을 심화시키고 말았다. 과거의 역사는 미래에 저당 잡히고 민족의 자긍심은 무치의 역사 앞에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권력의 선택과 배제가 가히 폭력적이다. 그래서 묻는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측에 힘을 실어 준 대통령은 과연 누구를 위한 지도자인가.
지금-여기, 국익을 사고하지 않는 자들이 국익을 말한다. 과거를 사고하지 않는 자들이 과거를 묻으려 한다.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개인이 향유할 자유의 일보도 기꺼이 유보하는 것이 우리의 역사였다. 우리는 과거에의 연루를 고통의 역사로 받아들인다. 고통의 자리에서 피어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역사의식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역사의식의 부재로 말미암은 불이익이 낭자한 치욕적인 정상회담의 결과는 전 국민의 심장에 분노와 고통의 화살로 꽂혔다. 여러 번의 외교 참사에도 ‘설마’ 하던 현실이 점입가경, 민족 역사를 무참히 꺾어 버리고 말았다. 비통하다. 민족의 영혼을 값싸게 파는 눈치 외교를 국익이라 할 수 있는가. 역사를 두 발로 힘차게 밟고 몸을 이끌고 나아갈 때 그 안목은 미래에 가 닿는다.
천천히 따져보자. 국익이란 자본의 논리로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존재론적 가치이다. 이는 소유나 소비를 통해 척도하고 축적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존재감을 높이는 것이 자신의 역사에 대한 자긍심이다. 그 자긍심이 공감의 감수성을 만들고, 공존의 능력을 만드는 바탕이다. 자긍심을 잃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여 지금 이 땅에서 역사를 비하하는 국익은 누구의 국익인가. 한국 국민이 그저 밥풀에만 관심 있는 노예인가. 자긍심을 잃은 민족에게 경제적 논리는 무색하다. 문화는 사라진다.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에 파렴치에 맞서 싸워온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지 말라.
하여, 국민의 자긍심을 일깨워주는 것은 정부가 최우선할 선택이다. 지금 정부는 국민의 자긍심을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그들의 수법대로 역사를 엮는다. 그로 인해 국민의 자긍심이 짓밟힌다. 자유와 평화의 자긍심은 무너진다. 자긍심을 잃어버린 아이들은 쉽게 주눅이 들고 눈치를 보고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다. 자신을 믿지 못한 사람을 누군들 믿겠는가. 지금 정부가 빼앗은 것은 우리의 미래이고 훔친 것은 정신이다. 친일매국의 망령은 역사의식의 부족에서 파생한다. 권력에 도취된 자의 논리는 가볍고도 가소롭다.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이다. 그들의 헐거운 논리에 편승하는 정부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부산작가회의는 고민한다. 과연 우리는 후손에게 어떤 미래를 선물할 것인가. 어떤 진실과 정의를 물려줄 것인가. 우리가 그동안 노력해 왔던 다자외교의 힘은 어디로 갔는가. 강제징용도 자발적이었다는 편협한 논리를 내세워 자의적으로 해석해버리는 일본, 독도를 일본의 고유 영토로 표기하는 교과서, 상호 불신을 조장하는 역사왜곡을 목도하는 지금, 혼자서 각자도생을 꿈꾸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우리에게는 오천 년의 역사가 있다. 그리스 자연철학에서부터 축의 시대를 통과해온 모든 동서양의 철학이 결국 생명 윤리를 위해서라면, 우리의 고대사상이 가진 ‘홍익인간’은 그야말로 찬란한 정신의 뿌리이다. 우리 안의 거대한 유산을 인식하지 못하고 K-문화가 선도하고 있는 이 세기에 한미일 신냉전체제 구축에 허둥대는 이 정부는 우리 역사를 퇴행시키려 함을 알고 있는가. 왜 윤석열 정권은 한일 과거사 문제를 지우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일본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는가. 3·16 한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일 지소미아를 복원시키는 것이 정말 우리 안보를 위한 것인가. 독도가 일본의 고유 영토라는 주장을 초등학교 교과서에 담은 것을 어떻게 호통칠 것인가. 미국이나 일본의 패권 야욕에 충실하게 이용되고 있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한국 정부가 더 신중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한 친일적인 사고라고 보기에는 우리 민족의 현실이 너무 위험하다. 지금 한국의 현실은 구한말의 친일·매국과 비슷하다. 너무 쉽게 한국의 주권과 혼과 역사를 엎어버리고 있다. 눈물과 피로써 지켜온 우리의 역사와 정신을 값싸게 팔아버린 이 정부에 대해 아연실색할 정도이다. 삼월 내내 제출된 해법이 우리의 국익이나 발전적 해결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강제징용 등 일제강점기의 고통을 하나도 해결하기 않은 채 그동안 투쟁해온 노력을 너무 안이하게 지워버리고 있다. 한국의 미래가 봉쇄되고 만 것이다.
부산작가회의는 비이성적인 현 정부의 발목에 우리 민족을 묶어놓을 수 없기에 이에 분연히 일어서고자 한다. 부산작가회의는 그 길, 과거를 밟고 몸을 이끌고 미래로 나가려 한다. 우리 민족이 지켜온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정부의 행태에 무너지는 억장을 부여잡고 안이하고 무책임한 이 정부의 역사의식을 규탄한다. 참된 국익은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국익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열심히 달리는데 엉뚱한 데로 가고 있다면 무슨 낭패인가. 방향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작가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시민은 이제 모두 나팔수가 되어야 한다. 정부는 시민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라. 지금 우리는 생각보다 위험한 위기에 처해 있다. 벼랑 끝에 선, 추락이 무엇인지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철부지 윤석열 정권은 정신을 차리고 미몽에서 깨어나야 한다. 우리는 자존심을 포기할 수 없고, 외면할 수 없다. 윤석열 정부는 멈춰라. 우리 민족의 뜨거운 양심을 기억하라.
2023.3 부산작가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