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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감수성, 키워드비난, 그리고 세월호......

작성일 23-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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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갑 소설가입니다.  게시판을 보면서 생각나는 것을 두서없이 적어보았습니다.  

부담없이 읽어보시길.  



강동수 작가의 언더더씨라는 단편소설을 보았을 때, 첫 페이지에서 다소 강렬한 느낌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현재 문제가 된 구절은 몇 가지 키워드에서 일반 여성들이 거부감을 느낄 만도 하다.

“젖가슴”, “탱탱한”, “박아 넣으면”, “즙액”. 더군다나 이 표현이 세월호 희생자인 고등학생,

​그것도 “여고생”의 특정 부위를 표현한 것이기에 그 거부감의 증폭 속도가 가중된 것 같다.
 


이제 인터넷에서는 이 소설의 내용이나 작가의 의도, 혹은 문학적 형상화보다는 여성들의 거부감을 증폭시키는 키워드만 난무하게 된다.

​본말은 급속히 전도된다. 그걸 본 인터넷 낭인들은 공분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세월호 희생자인 여고생에게 쓸 수 있느냐?

​이런 표현을 한 소설가는 어떤 사고방식을 가진 작자인가?

​여기에 덧붙여서 지상 신문에서 활자화된 기사는 키워드의 대량 확대를 가져온다. 논란이 일고 있다는 기사 자체가 논란거리를 확대한 것이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 영역에서 여성의 신체가 주요 소재로 등장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남녀 작가를 불문하고 여성의 신체를 지칭하는 단어는 무수히 사용한다.

​젖가슴이나 젖꼭지라는 표현은 여성 작가의 작품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김별아의 미실도 그렇고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도 젖꼭지, 엉덩이, 혀와 같은 키워드는 여러 차례 반복된다.

​그렇다고 해서 한강이나 김별아가 젠더감수성을 위반한 작가라고 할 수 있는가 말이다.

​이런 키워드는 문장 속에서 독자적인 질량을 가진다기 보다는 전체 문장에 복무하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이 문장도 전체 소설 구조에 복무하는 것이지 독자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

 


언더더씨에 등장하는 이런 단어들도 전체 문장의 한 부분으로서 기능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질량을 가진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어찌해서 몇 가지 키워드로만 이 문장을 해석하고 질타한단 말인가?

​또 그걸 가지고 강동수 소설가의 인격이나 사상을 의심하고 공격한단 말인가? 나는 그건 아니라고 본다.

 


댓글 공작이나 가짜 뉴스에서 흔히 쓰는 기법이 바로 키워드 확산이다.

​전체 문장이나 원문을 보지 않고 자극적인 키워드만 뽑아서 헤드라인으로 키우는 것이다.

​그럼 대중들은 제목만 보고 흥분하게 된다. 조중동을 비롯한 꼴통 보수 언론들도 이런 기법을 흔히 사용한다.

​지난 10년간 전임 정권하에서 인터넷 군중들은 이런 키워드 확산의 은밀한 동조자, 혹은 피해자가 된 경우가 많다.

​때로는 그걸 방치하고 은근히 즐기는 방조자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번 건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여성 단체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고 있다.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전임 정권하에서 골방에 갇혀 있었던 온갖 음험한 행동들이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페미니즘을 빙자한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다.

​워마드나 메갈리아 같은 여성 단체는 엄청난 언어폭력과 남성 혐오증을 무분별하게 드러내고 있다.

​물론 건전한 여성 단체는 훨씬 더 많고 이런 여성 단체의 활동이 이 사회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 단초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듯이 이 사회의 젠더 문제는 남녀 모두의 협조와 노력에 의해 극복되고 해결될 수 있다.

문제는 본질을 외면하고 몇 가지 키워드로만 사태를 확산시키고 방조하는 자세이다.

​언더더씨의 첫 페이지에서 강렬하게 등장하는 문장 하나만을 해석하는 자세가 문제인 것이다.

​어찌 보면 이런 표현은 여태껏 생산된 동서고금의 여러 문헌과 문학 작품, 예술 작품에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다만, 그것이 세월호와 여고생, 트라우마라는 키워드에 포위되어 확산되었을 뿐이다.

 


지금 부산여성단체들이 부산시장을 찾아가서 항의한다고 난리인 모양이다.

​소설 속에서 그런 표현을 썼으니 강동수 소설가는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했고,

​더군다나 그 대상이 세월호 희생자인 여고생이지 않는가.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해서 부산문화재단 대표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강동수 소설가가 파렴치한 미투 범죄자의 행동을 조금이라도 한 적이 있는가 말이다.

​또 그런 언어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는가 말이다.

​그는 소설이라는 문학적 장치를 구사한 사람이고 그 장치로 세월호 희생자를 위무하리라고 생각한 작가였을 뿐이다.

​그가 작가로서의 역할을 한 것과 부산문화재단 대표자로서의 역할이 무슨 상관관계란 말인가?

​소설에서 이런 표현을 쓴 사람은 미래에도 그런 행동을 실제로 할 사람이다?

​이거야 말로 비과학적인 추측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나는 이에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강동수 소설가와 호밀밭 출판사의 초기 대응은 문제가 있어 보였다.

​강동수 소설가의 글에서는 엘리트주의적이고 일방적인 공격적 성향이 여러 차례 보였다.

​또한 호밀밭 출판사에서도 언어 사용에 있어 순화되지 못하고 흥분된 측면이 많았다.

​그런 자세는 사태를 진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확대 증폭시키는 것이다. 그걸 미리 감지하고 신중하게 대응했어야 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작가와 출판사는 공식적으로 사과했으니 그걸로 일단락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최은순 작가의 페이스북과 본 게시판의 글을 유심히 읽어보았다.

​때로는 흥분한 모습도 보였고, 때로는 차분히 자신의 논조를 제시하는 것도 잘 읽어 보았다.

​최은순 작가도 나름의 철학과 소신으로 역할을 하는 것이며 그런 역할에 대해 나는 존중한다.

​또 문화예술계에 아직도 은밀히 진행되고 있는 반여성적이고 반인간적인 행위에 대해 싸워야 하고 그걸 저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인도 창작을 하는 작가로서 혹시 키워드 확산에 일조하는 것은 아닌지......

​앞으로 최은순 작가의 작품에서 이런 키워드가 등장하지 말란 법이 있는가?

​전체 문장의 한 부분으로서 꼭 필요한 위치를 가진 단어가 사용될 때도 있지 않을까? 그럼 그걸 감당해야 할 텐데.

 


하여간 이번 사태는 극복해야 할 여러 문제점을 시사한다.

​작가가 자신의 의지대로 문학적 표현을 하더라도 어차피 이 사회의 구성원인 만큼,

​다수 대중의 감수성을 예측하는 자세도 필요한 것 같다. 표현의 자유라지만 모든 표현을 다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런 것을 신중히 생각하는 것도 창작하는 사람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참 어려운 문제이다.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엉뚱하게 사태가 흘러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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