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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더 씨>사태에 대한 기록 : 예술의 윤리를 다시 쓰기 위하여

작성일 23-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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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더 씨>사태에 대한 기록 : 예술의 윤리를 다시 쓰기 위하여
부산문화예술계 반성폭력 연대


예술계는 지난 2년간 ‘예술계 성폭력’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젠더감수성이 중요한 가치로 자리매김 될 수 있도록
변화를 촉구하는 치열한 노력을 해왔다.
그리하여 2019년에는 예술계가 성평등 한 방향으로 한걸음 나아가는 결실을 맺길 많은 예술인들이 바랬다.
그러나 연초에 여성을 성적대상화 한 것으로 문제가 된 소설의 작가와 작품을 출간한 출판사의 입장표명을 접하며,
예술인으로서 느낀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해당 작가와 출판사는 최근에 입장을 철회하고 사과문을 발표하였지만, 이 사태가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지
여성 예술인들의 목소리를 남기고 기록하는 차원에서 글을 쓴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를 화자로 다룬 소설 <언더 더 씨>에서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내 젖가슴처럼 단단하고 탱탱한 과육에
앞니를 박아 넣으면 입속으로 흘러들던 새큼하고 달콤한 즙액’이라는 대목이다.
해당 구절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 필자는 ‘문화부의 문학기자, 문화부장’을 역임한 자신의 지위와 경력,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합리화하는 첫 입장표명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언더 더 씨> 논란의 핵심은 이 문장이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부적절한 표현이자, 희생자인
여성청소년을 성적대상화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문학적 장치’라는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세월호 희생자인 여성 청소년의 몸이 지극히 남성중심적인
필자의 시선에 의해 서술되었으며, 여성청소년인 화자가 자신의 몸을 건너다본 시선이 아니라,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남성의 시선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작가는 독자들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비판하고 있다고 입장을 내놓으며
이 사태의 핵심을 잘못 파악하였다. 독자들이 비판한 것은 텍스트 내의 묘사와 표현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세월호 희생자인 여성 청소년의 몸을 성적인 시선으로 대상화했다는 점이다

많은 예술작품들에서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고 차용하는 방식은 여성에 대한 혐오, 차별, 상품화,
성적 대상화 등으로 비판 받아 왔다. 자본주의의 모순과 물신성 고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탄압,
생태계 파괴와 보존, 국정농단의 폐해 등 사회적 폭력을 고발하는 예술작품에서 여성을 성적도구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표현의 자유를 빌미로 손쉽게 용인된다.

국가폭력에 대해서는 문제를 삼으면서, 정작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에 대해서는 사소한 것으로 축소한다.
그러나 어떤 폭력에 대해 고발할 때 또 다른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고 소외시키지 않고도 예술은 가능하다.
그럼에도 예술작품 속 여성들을 여성혐오적인 시선으로 재현하는 고질적인 문제는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

그때마다 작품을 두고 일었던 논란에 대해 작가와 평단을 비롯한 예술계 대부분의 입장은 매번 비슷한 논조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인권과 존엄보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와 전달내용에 더 무게중심을 두었고,
표현의 자유는 가히 무소불위의 명분이 되어 여성의 인권이나 존엄보다 늘 우위에 있었다.
예술가의 창작활동을 정당성으로 내세워 여성을 예술작품의 도구이자 재료로 착취해왔다.

예술에 있어 표현의 자유는 약자를 향한 폭력과 혐오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차별받은 이들을 수호할 때 비로소 용인되는 가치이다. 예술은 제도권 바깥으로 밀려난 주변부, 변두리,
국경 바깥에 있는 존재의 삶과 목소리가 되어주기도 하고, 그 삶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매개의 역할이 되기도 한다.

타인의 고통을 표현함에 있어서 예술가들은 이들을 대상화하지 않고, 착취하지 않는 예술적 언어를 사유하고 발굴해야 한다.
예술이 누구의 곁에 서야하며, 누구의 언어로 말해야 하는지, 누구의 시선과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조명해야 하는지,
예술은 늘 질문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사태에 응답한 작가와 출판사의 첫 입장표명 내용을 뼈아프게 읽었다.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작가와 출판사가 대응한 태도와 언어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문제제기하는
이들을 향해, 낙인찍는 언어들과 닮아있었다.

‘경박한’, ‘천박한 문학 텍스트 읽기’, ‘문해력의 수준차이’를 논하는 것은 문단의 엘리트주의적이고 권위적인 관습을 반증하고 있다.
 ‘극렬페미니스트’, ‘반지성주의’, ‘메뚜기떼’, ‘대중파시즘’이라는 말을 빌어 젠더감수성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특정성향의 편향적인 의견으로 매도하고, 낙인찍는 것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예술계 행태에 대한
항의와 문제제기의 목소리에 귀를 닫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지역에서 신뢰와 권위를 가지고 활동해온 작가와 출판사가 이런 입장과 태도를 취할 때, 그 언어가 가지는
영향력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에게 어떤 작용을 하고, 어떤 미래를 보여주는지 성찰해주었으면 한다.
또한 해당 작가와 출판사가 고군분투해왔던 그 이력과 가치가 현재 예술인들이 바꾸고자하는 성평등한 예술계,
 젠더감수성이 보편화되는 예술계와 맞닿을 수 있는지 질문해본다.

우리는 무엇을 해왔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상상하고 실천할 수 있는 ‘미래의 예술’에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길 절실히 바란다.

2019-01-13  최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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