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작가회의 시평 에세이3- 마침내,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
작성일 23-04-27본문
마침내,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
도시는 밤마다 누군가의 고된 노동을 밟고 일어난다. 저 빛나는 불빛을 마주하며, 대개는 부산의 야경에 취해 감탄을 연발할 테지만, 연상되는 건 어떤 노동자 눈이다. 어느 날이었다. 정치에 쏟아지는 비난과 정쟁에 밀려 누군가는 다시는 뉴스를 시청하지 않는다는 말들이 주위를 날아다녔고 여름 내 상식이 시궁창에 박힌 채 썩어가는 미래를 걱정했으며 그런 말들이 만드는 풍경 속으로 질주하는 더위는 마침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그날, 바로 그 시간. 사람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어떤 공간에서 무언가 호소하는, 손에 든 글씨와 그의 눈빛이 동시에 나를 향해 육박해 왔다.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
마침내 나는 얼마나 기만적인가. 예전에 내가 썼던 글들이 나를 윽박지른다. 자본가는 노동 강도가 높고 임금은 낮은 노동은 대부분 하청이라는 방식을 통해 해결한다. 누군가에겐 할 일이 아니지만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만 한다. 익명의 누군가를 나는 노동자라는 전형 안에 가두어 버렸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착취로 수혜를 본 사람은 상위 정규직 노동자, 그는 결국 제국 시민의 일원으로 반면 하청노동자, 노동의 외주는 식민지를 다시 살아가야 된다.
신자유주의 시대 공간은 누군가를 원심 분리한다. 분리는 배제다. 배제당한 자의 두려움은 잊히는 것이다. 공간을 차지하면 누군가는 공간을 떠난다. 그러나 공간을 차지하지도 못하였고 그렇다고 떠나지도 못하는 자, 있으나 있지도 않은 자. 나는 그들에게 너무 소홀했다. 나는 의지를 자본에다 빼앗기고 말았다. 강철로 사각형의 공간에 자신을 유폐해야만 우리는 그의 말을 듣는다. 그는 몸의 언어로 말한다.
마침내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나. 나는 노동으로 삶을 살아간다. 내 삶은 언제나 위기였다. 그러니 노동은 언제나 위기다. 이 위기를 벗어나려고 한 수많은 시도들은 어쩌면 빼앗긴 의지를 다시 찾으려는 몸부림에 불과했다. 그럴 때마다 삶을 부정하는 수많은 생각들에 빠져 허우적댔다. 푸념은 망상으로 이어지고 사위는 어두워진다. 하나의 변명. 먹고 살기도 바쁜데 다른 이를 신경 쓸 처지가 되는가. 그러나 이대로 살 순 없다. 그걸 알면서도 마침내 나는 제자리다.
‘마침내’라는 부사에 기댄 이유는 오래되어 익숙한 질문이 되어 버린 노동에 대한 감각을 저 문장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늦었지만, 마침내 좁은 강철에다 자신을 가두어 버린 한 노동자의 저 언어는 이대로 살 순 없다는 의지를 부추긴다. 그러니 나는 그와 연루되어 있다. 연루는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만, 이미 남의 일이 아닌” 것을 의미한다. 남의 일이 아니니 뭔가 일어나야 하고 움직여야 한다. 자신의 일은 아니지만 자신의 일처럼 느끼는 감각, 그리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말하는 것. 이미 남의 일이 아니니까 이 사건은 이전부터 끈질기게 너와 나의 삶에 붙어있는 문제이다. 이제 분리를 벗어나야 한다. 마침내는 결국 시간, 시간은 공간을 이겨낸다.
하이에크는 “사유재산권의 자유로운 처분에 기초한 경쟁 체제”를 옹호했다. 하이에크가 어느 시대 사람인가. 그가 말한 사유재산권의 자유로운 처분이 지금의 시대와 별로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자유로운 처분”, 내가 내 돈 쓰는데 말이 많은가와 동의어로 들린다. 그러나 각자의 자유의지가 얼마나 불평등한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법적으로 노동자와 기업주는 평등하며 각자의 자산인 노동력과 화폐를 교환한다. 자유는 화려한 말이자, 매혹적인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은 누군가의 고통을 감추는 말이다.
마침내 나는 노동에 대한 성찰을 하고야 말겠다. 의지는 모든 문제를 꿰뚫는다. 그리고 그 의지를 수식하는 착취라는 단어를 생각해 본다. 착취라는 단어는 인격적 윤리적 차원의 느낌을 주어 즉각적인 반감이 들게 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말한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건 자본가가 노동자와 맺은 합법적 계약을 준수하며 노동이 만들어낸 가치의 일부를 제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저 노동자의 문제를 윤리적 차원으로 접근하지 말자. 윤리적 차원은 본질을 가린다. 금융이나 지대 소득이 자본과 토지/건물에서 만들어진다고 전제함으로써 모든 이윤이 노동자의 잉여노동에서 착취한 거라는 사실을 가린다. 그것은 불공정이 아니라 착취이다. 막스 베버를 한탄한다. 그가 말한 자본가의 금욕정신은 자본주의사회를 이루는 골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더 많은 축적을 위해 덜 소모하는 건 금욕이 아니라 더한 욕망이다. 대기업이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더한 욕망에서 나온다.
시간이 지나자 그는 ‘구출’되었다. 억압 상태에 있는 그를 다른 사람들이 빼내 주었으니 그는 결국 구출된 셈이다. 씁쓸하다. 그가 정말 착취로부터 해방이 된 것일까. 자기해방이라는 말은 자기 스스로 해방을 이뤄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해방은 다른 사람이 해 줄 수 없다. 그에게 닥친 또 다른 시련을 말하진 않겠다. 단지 나는 그를 보며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나를 억압하는 것들 앞에서 다시는 먹고 사는 문제로 현실을 회피하지 않겠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는 마음보다는 그들을 대하는 길을 찾겠다. 그러나 당차게 자기해방을 말하면서도 이 글을 쓰고 있다는 자체가 그들에게는 얼마나 미안한 일임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적는다.
평론가 김남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