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작가회의 시평 에세이2 - 유월의 어둠
작성일 23-04-27본문
< 유월의 어둠 > 안민 시인 멧비둘기 한 맺힌 것 같은 울음소리 구슬프게 들려온다. 꾸욱- 꾸욱- 꾸룩- 꾸룩- 지난 5월 광주 ‘오월 문학제’로 향하는 여정에서 평소 존경하는 박 선생님께서 멧비둘기 울음을 흉내 내어 들려주셨다. 박 선생님은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관련 아픈 가족사를 지닌 분이다. 다시 또 6월이다. 나는 깊은 생각에 잠긴다. 뱀의 혓바닥과 악마의 미소가 패배하고 희망과 정의는 실현되었는가. 실록 짙어가는 이 계절,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피 흘리며 죽어간 영혼들은 과연 안식의 지대에서 평화로울 것인가. 진정 의문이다. 국민을 지켜야 하는 군인이 국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댔다. 21세기 대명천지에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다. 2021년 2월의 일이니 500일가량 되었다. 체포, 수감 된 이는 가늠할 수 없고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도 속출한다. 미얀마 군부에 대해 국제사회의 비판이 고조되는데도 군부는 사형집행을 계속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저항하다 희생당한 이들이 수천 명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희생의 유형은 총살, 진압 중 피살, 구금 중 살해, 취조 중 사망, 옥중 사망 등 다양하다. 미얀마 소식을 들으면서 뭔가 기시감이 든다.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를 일으킨 반란군 수괴 전두환과 그 일당의 잔인한 형상과 겹친다는 말이다. 그들은 5·18 학살, 삼청교육대와 녹화사업, 민주인사에 대한 감금, 그리고 고문치사 같은 만행을 자행한 인두겁을 쓴 악마의 무리이다. 나의 20대는 쿠데타의 수괴 전두환과 그 군부로 암울했다. 나는 1984년 11월에 입대하였다가 1987년 5월 7일에 전역했다. 지독하게 캄캄한 구간에서 군 생활을 한 것이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에 커다란 바위 하나 들어앉은 느낌이다. 당시엔 대학 진학률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까닭에 대학을 다니다 입대한 병사들은 뒷조사를 당하거나 “너 대학 다니면서 데모했지?”라는 말로 심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예사였다. 운동권 이력이 드러난 병사들에겐 보안대 요원이 상시로 따라붙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이고 인간을 비참하게 만든 일은 보안대에서 비밀리에 추진한 ‘녹화사업’이었다. ‘녹화사업’이란 빨간 물이 든 학생들을 파란 물로 바꾼다는 신군부의 작전명이었다. 운동권으로 의심되는 학생들을 강제 징집하여 그들에게 배신과 밀고를 강요한 사건이었다. 즉, 프락치 활동을 시킨 것이었다. 그것을 거부하는 병사들에겐 고문, 회유, 협박이 기다릴 뿐이었다. ‘녹화사업’에 의한 피해자 수는 1,100여 명에 달하였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밝힌 숫자니, 실제로는 더 광범위하였을 것이다. 이 가운데는 사망에 이르러거나 정신적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정신질환자가 된 이들도 적지 않다. 이윤성, 정성희, 한희철, 김두황, 김용권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들의 죽음이나 병인(病因)은 자살과 개인적인 일로 조작되었다. 군 생활 중, 또 하나의 참혹한 일은 선거였다. 1985년 2월에 제1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나는 강원도 최전방 부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전방부대에서의 선거는 관권 불법 선거 자체였다. 직접, 비밀 투표는 보장되지 않았다. 군 간부들은 모든 병사를 상대로 면담을 하였고 여당 후보에게 표를 행사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군 행정반에서 실시된 투표는 비밀 투표가 아닌 공개 투표였다. 선거를 공정하게 감시할 감시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또한 정훈 교육은 군인 정신이나 건전한 국가관의 심화가 아니라 진보 인사와 운동권 대학생, 천주교 사제들을 빨갱이로 주입하는 게 목적이었다. 여하튼 군사정권에서 정한 기준을 벗어나면 구타와 폭언과 따돌림이 비일비재하던 군 문화에 나는 치를 떨었다. 군 복무를 마치기 한 달 전인 1987년 4월에 전두환 일당은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당시 부산 태화고무 노동자였던 황보영국은 5·18광주민주화운동 7주년을 맞아 5월 17일 서면에서 열린 호헌조치 규탄 집회에 참가했다. 그는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서면 옛 부산상고 앞에서 분신하여 산화했다. 황보영국은 화상에 신음하면서도 “독재타도”를 외쳤고 “하느님,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절규하며 숨을 거뒀다.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제대 후에 한 달도 되지 않은 시기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국민은 분노했다. 나도 거리로 뛰쳐나갔다. 가야대로와 서면 그리고 중앙동 거리에서 시위에 동참했다. 6월 초엔 연세대 정문 앞에서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다 유명을 달리했다. 6월 18일엔 이태춘이 무차별 난사한 다연발 최루탄과 직격탄에 맞아 온몸에 최루가스를 허옇게 뒤집어쓴 채 좌천동 고가도로(일명 오버브릿지) 아래로 추락하여 생을 마쳤다.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나는 현장에서 그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참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울음과 울분만 쏟아져 나왔다. 5공화국 전두환 군부 세력이 저지른 잔혹 행위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루 언급하기 어려울 정도로 숱한 인권탄압과 불법이 만연했다. 박종철과 이한열과 그리고 녹화사업에 희생된 이들과 6월 항쟁 때 생명을 잃은 이들은 모두 나와 연배가 비슷한 젊은이였다. 나는 그 격동의 현장에서 생각했다. 숱한 민주화 항쟁과 민중의 희생을 치르면서도 왜 우리는 여전히 국가폭력에 노출되고 민주주의는 정체되고 있는가를. 프랑스는 시민혁명 과정에서 시행착오와 한계는 있었을지 몰라도 그 이후 민주화가 탄탄하게 안착되었다. 그런데 나의 조국은 왜 이렇게 참담해야만 하는 걸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프랑스 시민혁명의 경우, 권력자의 처단과 단죄가 이루어졌기에 권력자가 민중을 두려워하는데, 우리나라는 민중만이 피를 흘렸기 때문에 권력자가 국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2022년 6월, 이 땅의 민주화는 과연 완성되었는가. 나는 단연코 그렇지 않다고 온몸으로 부르짖고 싶다. 수구 보수들은 5·18이든 6월 항쟁이든 다 불순한 세력들이 국가 전복을 도모한 사태라고 왜곡한다. 심지어 북한이 사주한 일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니 군사 독재 세력의 후예와 그 세력에 기생한 자들이 극우단체를 설립하여 백주 거리를 활개 치며 낯 뜨거운 일들을 벌이는 것이다. 피 흘리며 죽어간 민주 영령들을 폄훼하는 것이다. 진보세력을 빨갱이로 몰아가는 것이다. 더욱이 “가난하고 배운 게 없으면 자유를 모른다”, “전두환도 정치를 잘했다는 사람이 있다”라는 망발을 하고, 부마 항쟁과 6월 항쟁을 분간조차 하지 못하는 파렴치한 자가 정권을 잡은 것이다.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민주화를 위해 산화한 영령들께 너무나 송구하고 황망한 6월이다. 지난 일들은 잊자며 용서와 화해를 언급하는 무리에게 몇 마디 강조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한국인을 ‘망각의 민족’이라고 한다.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 일본 위정자들이 뱉은 말이다. 쉽게 잊어버리는 민족이니 두렵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역사는 ‘망각과의 투쟁’이다. 조지 오웰은 『1984년』에서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고 말했다. 카뮈는 관용과 용서에 대해 “누가 감히 용서를 말하는가? 내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기억을 기초로 하는 정의다”라고 일갈했다. 군사 쿠데타 수괴 전두환과 그 일당이 저지른 만행을 이 6월에 다시금 온몸에 판각해야 할 이유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되듯, ‘망각과의 투쟁’에서 패배할 때 지금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일들이 이 땅에서 재현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 미얀마는 과거 ‘버마’라고 불리었다. 아마도 70년대 혹은 그 이전에 출생한 사람이라면 ‘버마 아웅산 폭발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이 또한 전두환과 그 일당들이 관련된 사건이다. 전두환은 영구집권에 대한 욕심으로 당시 권력에서 물러났지만, 막후실세로 권력을 휘두르던 버마(미얀마)의 네윈 통치를 참고하기 위해 계획에도 없이 갑작스레 미얀마 방문을 추가했다. 그러다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 박종철은 1987년 1월에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숨졌다. 그의 나이 21세 때의 일이다. 당시 수사관들은 1985년 10월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된 박종운 씨의 소재를 말하라고 추궁했으나 박종철은 끝내 함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