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 저자/책명
- 강미정/검은 잉크로 쓴 분홍
- 출판사/년도
- 북인/2024
본문
1994년 월간 시전문지 『시문학』으로 등단한 강미정 시인이 2008년에 출간한 네 번째 시집 『그 사이에 대해 생각할 때』 이후 16년 만에 다섯 번째 시집 『검은 잉크로 쓴 분홍』을 현대시세계 시인선 162번으로 출간했다.
강미정의 시집 『검은 잉크로 쓴 분홍』에 가장 자주 반복되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눈물 혹은 울음의 유사어들이다. 강미정은 젖은 눈으로 세계를 본다. 그녀는 복잡다단한 세계를 눈물로 약호화한다. 그녀의 젖은 눈은 주로 가난한 것, 힘든 것, 죽어가는 것, 슬픈 것, 불쌍한 것들의 뒷모습을 향해 있다. 그녀는 그런 세상의 슬픈 뒤꼭지를 보고 운다. 진짜 울음은 슬픔으로 그치지 않는다. 진정한 울음은 사유이고 통로이며 대안이다. 진짜 울음은 진실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물이 넘칠 때 사랑이 넘치며 세계에 대한 진정성이 넘친다. 눈물은 크다. 눈물은 모든 것을 안기 때문이다. 젖은 눈은 깊다. 젖은 눈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강미정 시인이 젖은 눈으로 세상을 읽을 때, 독자들은 그 시선에서 순도 높은 사랑의 영혼을 읽는다. 슬픔도 힘이 세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것이다. 시인의 젖은 눈이 빛나는 것은 그것이 타자에 대한 큰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기 설움의 눈물은 타자의 외부에 머물 뿐이다. 그것은 사랑이 없으므로 속이 없는 울림과 같다. 시인이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보편적 아픔에 매우 민감한 안테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강미정의 시 속에선 서툰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녀의 문장은 오랜 수련 끝에 잘 닦인 무인의 솜씨처럼 단호하며 자연스럽고 매끄럽다. 그녀는 젖은 눈으로 세상을 읽되 감상에 빠지지 않고, 인간과 세계의 고통을 이야기하되 과장하지 않는다. 눈물의 코드로 세계를 읽으면서도 그는 비개성의 시학(the poetics of impersonality)을 실천하듯 센티멘털리즘과 거리를 둔다. 그녀는 슬픔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울릴 줄 아는 기술의 소유자이다.
시 「벚나무 흰 치마」가 돋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상투적인 구도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가장 화려한 봄꽃의 하나인 벚꽃은 통상 약동하는 젊음과 절정에 이른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그러나 시인이 뽀얗게 아름다운 “벚나무 그늘 속”에 배치한 것은 아름다운 청춘들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인생의 종점에 와 있는 “할머니 네 분”이다. 이들은 “와그르르 쟁강, 놋요강 굴러가는 소리”로 축제처럼 떠들며 벚나무의 화려함을 절정으로 이끈다.
강미정 시인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산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는”(「기꺼이 다른 것이 되어가고 있는 중」)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시 속에 거대 서사나 환상의 세계가 들어올 자리를 만들지 않으며, 대신 삶에서 쪼개져 나온 소소한 하루들이 오글거리도록 한다. 아버지와 엄마로부터 생겨난 피붙이들과 낯 모르는 사람의 식솔들까지 안부를 챙기고 섬겨서 시집에 살게 한다.
그녀의 감성과 상상력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들은 이토록 사소한 생활, 새들한 감정이지만, 시로 빚어진 그것은 무한히 자라나는 삶의 모습들이라는 점에서 아릿하게 따뜻하고 갸륵하다. 또한 천성적으로 그녀는 약하고 버려진 것들을 거두어 마음으로 먹이고 입히는 사람인데, 이런 태도는 시의 어조와 어법에 그대로 스며 사랑하라는 속삭임이 시의 저 뒤편에서 들려온다. 문면에 드러나지 않아도 “얼얼하게 아리고 맵고 뜨거운”(「에∼한 말을 얻다」) 삶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도 곳곳에서 느껴진다. 무엇보다 묵묵한 견딤의 시간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면, 한 사람이 다른 이를 위해 해낸 최대의 선량을 보고 싶다면 이 시집이 그 대답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