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 저자/책명
- 최승아/비가역적 강의실
- 출판사/년도
- 신생/2024년 10월
본문
그녀의 시에는 어린 시절의 정신적 외상과 추억들이 아픔으로 작동하고 있지만, 그 기억들이 현실로 향하면서 타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 베풂의 마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세상은 답답하고 막혀 있지만 그녀는 그 세상을 따뜻한 감성으로 끌어안고 있다. 스스로의 아픔과 고통을 안으로 삭이면서 타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여성의 특유의 공감의 감수성이 아니면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현실은 닿을 수 없는 단절로 가득하고, 어린 시절의 정신적 충격과 아픈 추억들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지만 그것이 바깥으로 향할 때는 외려 따뜻한 모성과 같은 감성으로 나타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지극한 슬픔의 끝에는 새로운 기쁨과 환희로 충만해지는 역설의 감정이 나타나기 때문은 아닐까. 타고 남은 재가 기름이 되고, 고갱이만 남은 나무에 새로운 싹이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가능한 채널은 가능한 채널로 바뀌고, 현실의 어두운 부분을 밝은 부분으로 바꾸는 역동의 힘이 그녀의 시에 잠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시에서 슬픔과 고통은 시적 역설의 미학을 통해서 현상의 궁극을 바꾸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 편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일상이 시이면서도 일상의 경계를 넘어서 낯선 비유의 세계를 거닐기도 하고, 여성의 섬세한 감각으로 현실을 바라보기도 한다. 어린 시절의 정신적 상처가 그녀의 심연에 가로 놓여 있지만, 그 심연의 슬픔과 고통을 새로운 삶의 온정으로 바꾸고, 닫힌 현실의 공간을 열린 공간으로 바꾸고, 불가능한 채널을 가능한 채널로 바꾸고, 비가역적인 현실을 가역적인 현실로 바꾸려고 한다. 그 변화의 여정을 소망하는 그녀의 시는 그러나 격동하지 않는다. 잔잔하고 따뜻한 감성으로 세상의 변화를 조심스럽게 바꾸어가려고 한다. 낯선 비유의 시어들이 장벽으로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 언어의 장벽을 하나하나 걷어내는 순간 그녀의 시가 지닌 내적 마력을 만나게 될 것이다. 오래보고 자세히 보고 깊이 보아야 그녀의 심중에 놓인 슬픔의 농도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슬픔의 농도를 넘어서는 삶의 온정(溫情)을 만날 수 있다.-황선열(문학평론가)